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성 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오토 왕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독일 왕국)] [[파일:external/jettandjahn.com/ottopope.jpg]] 카롤루스 대제 사후 843년 [[프랑크 왕국]]은 베르됭 조약으로 3분할되었다. 그중 독일 지역은 동프랑크 왕국이 차지하였다. 911년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4세(동프랑크)|루트비히 4세]](유아왕 루트비히)가 후사없이 죽으면서 카롤루스 왕조의 대가 끊기자 귀족들은 루트비히의 친척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콘라트 1세 역시 후사없이 죽었고, 후계자로 당시 가장 유력한 세력을 보유했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를 지명했다. 그러나 5대 공작령 중 [[슈바벤]]과 [[바이에른]]이 하인리히 1세의 선출에 반대했기 때문에 한동안 하인리히 1세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정치적 협상을 통해서 슈바벤과 바이에른도 하인리히 1세를 국왕으로 인정했다. 일반적으로 하인리히 1세 시절부터 [[독일 왕국]]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된 이후 독일 왕국의 왕들은 5대 공작령 대표들의 '''선출'''에 의해 왕위를 물러받게 된다. 콘라트 1세와 하인리히 1세의 경우 이전 왕들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라 치더라도,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인 [[오토 1세]] 역시 선출을 통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전통은 고대 게르만족으로 부터 이어온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은 오토 1세부터 시작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선출'''하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귀족들이 선출한 것은 독일왕([[로마왕]])이며, 독일왕(로마왕)으로 선출된 이후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야 정식으로 황제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 교황이 대관하는 절차를 없애고, 선제후들의 선출만으로 바로 황제위에 오르게 된 것은 1493년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 황제 때 부터다. [include(틀:프랑크 왕국의 분열)] 하인리히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오토 1세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1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슬라브]]족과 [[마자르족]]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962년 [[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 왕국]]의 군주 베렝가리오 2세가 [[교황령]]을 침략하자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왕국을 정벌하고 그 공로로 동년에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게 되었다. 교황 입장에서는 명목상으로나마 유럽 세계 전체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권위로써 누군가를 내세워야 하는 판이었는데, 이때 큰 활약을 보이는 오토 1세를 (서)로마의 황제(정확히는, '로마인의 왕')로 내세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토 1세 때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 혹은 [[로마 제국]]이라는 칭호보다는 그냥 "제국(Imperium)"으로 불렸다. 이후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2세]] 때부터 로마 제국이라 칭했고, 로마 제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왕위를 받아낸 오토 3세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이라 불리게 된다. 오토 1세가 황제의 대관을 받은 후 제위는 (중간에 끊긴 적도 많았지만) 대대로 계승되어갔다. 하인리히 공에 의해서 시작된 작센 왕조는 오토 1세부터 이어지다 잘리어(Salier) 왕조로 계승되었고 잘리어 왕조는 다시 호엔슈타우펜 왕조로 계승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